찰스 휘트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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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찰스 휘트스톤은 1802년에 태어난 영국의 과학자이자 발명가였다. 그는 음향학, 전기, 광학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를 수행했으며, 특히 전기 전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휘트스톤은 윌리엄 쿡과 협력하여 5침식 전신을 개발했고, 휘트스톤 브리지, 스테레오 스코프, 콘서티나, 심포니엄, 자동 전신 시스템 등 다양한 발명품을 만들었다. 그는 또한 광학 연구를 통해 입체 시각과 관련된 이론을 정립하고, 암호 연구에도 기여했다. 휘트스톤은 1868년 기사작위를 받았으며, 로열 메달, 베이커리언 메달, 앨버트 메달, 코플리 메달 등 여러 권위 있는 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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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휘트스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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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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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02년 2월 6일 |
출생지 | 반우드, 글로스터, 잉글랜드 |
사망일 | 1875년 10월 19일 |
사망지 | 파리, 프랑스 제3공화국 (현재 프랑스) |
국적 | 영국 |
학문 분야 및 경력 | |
분야 | 물리학, 전기 공학 |
소속 기관 | 킹스 칼리지 런던 |
업적 | |
주요 업적 | 휘트스톤 브리지 휘트스톤 시스템 휘트스톤-플레이페어 암호 휘트스톤 ABC 전신 쿡과 휘트스톤 전신 칼레이도폰 전위차계 가현거울 입체경 |
수상 | 로열 메달 (1840년, 1843년) 앨버트 메달 (1867년) 코플리 메달 (1868년) |
기타 정보 | |
관련 인물 | 올리버 헤비사이드의 삼촌 |
2. 생애
찰스 휘트스톤은 영국 글로스터셔 번우드에서 악기 판매상의 아들로 태어나, 4살 때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했다. 어린 시절부터 수줍음이 많았으나 지적 호기심이 강했으며, 특히 과학 분야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4세에 악기 제작자인 삼촌 밑에서 도제로 일했으나, 수공예보다는 독서와 연구에 더 몰두했다. 15세에는 프랑스 시를 번역하고 작곡을 하기도 했으며, 볼타의 전기에 관한 책을 읽고 직접 실험을 하며 과학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1823년부터 1834년까지 아버지에게 악기 제작 기술을 배웠고, 1828년에는 콘서티나를 발명했다. 초기에는 음향학 연구에 집중하여 1833년 연구 결과를 발표했으며, 같은 해 새뮤얼 헌터 크리스티의 전기 저항 측정법을 개량하여 휘트스톤 브리지를 개발하고 스테레오 스코프도 발명했다. 1834년에는 킹스 칼리지 런던의 실험 물리학 교수가 되었고, 전선 속 전류의 속도를 최초로 측정하는 데 성공했다. 1836년 왕립 학회 펠로우로 선출되었으며[26], 1840년에는 레오스타트를 발명했다.
이후 전기 기술자 윌리엄 쿡과 협력하여 전신 개발에 큰 기여를 했다. 1836년 5침식 전신기를 발명하여 이듬해 성공적으로 시험했으며, 이는 철도 시스템에 도입되었다. 또한 자동 전신 시스템을 완성했으며, 1854년에는 친구 플레이페어 경과 함께 사용할 플레이페어 암호를 고안했다.
1847년 엠마 웨스트와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으나, 1866년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대중 앞에서는 과묵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자신의 연구에 대해 유창하게 설명하는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팜스턴 경과의 일화는 그가 자신의 발명품인 전신의 중요성을 역설했음을 보여준다.
휘트스톤은 자동 전신을 완성한 공로로 1868년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2],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비롯해 국내외 학회로부터 약 34개의 훈장과 학위를 받는 등 과학적 업적을 널리 인정받았다.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1859년)와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1873년)의 외국인 회원이 되었고,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1875년 가을, 해저 케이블 장비 개선을 위해 파리를 방문했다가 폐렴에 걸려 그해 10월 19일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런던으로 옮겨져 켄살 그린 묘지에 안장되었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찰스 휘트스톤은 영국 글로스터셔의 번우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W. 휘트스톤은 그 마을에서 악기 판매상이었으며, 찰스가 4살 되던 해에 런던의 128 팔 몰로 이사하여 플루트 교사가 되었다. 찰스는 둘째 아들로, 글로스터 근처의 마을 학교와 런던의 여러 학교에 다녔다. 그중 하나는 켄싱턴에 위치한 캐슬메인 부인이 운영하는 학교였는데, 그녀는 찰스의 빠른 발전에 놀라워했다. 그는 다른 학교에서 도망친 적도 있었지만, 훗날 그의 실용적인 전신 시설이 설치된 윈저에서 붙잡히기도 했다. 어린 시절 그는 매우 수줍음이 많고 예민하여, 자신의 생각에 잠겨 아무도 없는 다락방에 숨어 있기를 좋아했다.

14세 무렵, 휘트스톤은 런던 436 스트랜드에서 악기를 제작하고 판매하는 그의 삼촌이자 동명이인에게 도제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수공예 작업이나 사업에는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러한 아들의 성향을 격려하며 결국 삼촌의 관리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15세에 휘트스톤은 프랑스 시를 번역하고 두 곡의 노래를 작곡했다. 그중 한 곡은 그의 삼촌에게 전해졌는데, 삼촌은 조카의 작품인 줄 모르고 이를 출판했다. 그가 리라에 대해 쓴 몇몇 구절은 바르톨로치의 판화에 모토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는 당시 황폐하고 포장되지 않은 길이었던 런던 팔 몰 근처의 오래된 책 가판대를 자주 방문했으며, 용돈 대부분을 요정 이야기, 역사, 과학 등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사는 데 사용했다.
어느 날, 그는 볼타의 전기에 대한 발견을 다룬 책을 몹시 갖고 싶어 했으나 돈이 부족했다. 그는 동전을 모아 결국 그 책을 손에 넣었다. 책이 프랑스어로 쓰여 있었기 때문에, 그는 사전을 살 돈을 모을 때까지 다시 기다려야 했다. 사전을 구한 뒤 그는 책을 읽기 시작했고, 형 윌리엄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 집 뒤편 부엌에서 직접 만든 배터리로 책에 설명된 실험들을 재현했다. 배터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필요한 구리판을 구할 돈이 부족해지자, 그들은 가지고 있던 구리 동전 몇 개를 활용하자는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고, 곧 배터리를 완성할 수 있었다.
2. 2. 과학에 대한 관심과 초기 실험
찰스 휘트스톤은 영국 글로스터셔의 번우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W. 휘트스톤은 악기 판매상이었으며, 찰스가 태어난 지 4년 후 런던의 128 Pall Mall로 이사하여 플루트 교사가 되었다. 찰스는 글로스터 근처의 마을 학교와 런던의 여러 학교를 다녔다. 그중 하나는 켄싱턴에 있었는데, 그곳 운영자는 그의 빠른 발전에 놀라워했다. 그는 또 다른 학교에서 도망치기도 했으나, 훗날 그의 전신 시설이 설치된 윈저에서 붙잡혔다. 어린 시절 그는 매우 수줍음이 많고 예민하여, 혼자 다락방에 숨어 생각에 잠기는 것을 좋아했다.
14세 무렵, 그는 런던 436 Strand에서 악기를 제작하고 판매하는 삼촌 밑에서 도제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수공예나 사업보다는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러한 성향을 격려하며 결국 그가 삼촌 밑에서 나오는 것을 도왔다.
15세에 휘트스톤은 프랑스 시를 번역하고 두 곡의 노래를 작곡했다. 그중 한 곡은 그의 삼촌에게 전해졌는데, 삼촌은 조카의 작품인 줄 모르고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런던 팔 몰 근처의 헌책방을 자주 드나들며 용돈 대부분을 요정 이야기, 역사, 과학 등 관심 있는 책을 사는 데 사용했다.
어느 날, 그는 볼타의 전기에 관한 발견을 다룬 프랑스어 책을 발견하고 큰 관심을 보였다. 책을 살 돈이 부족했던 그는 동전을 모아 겨우 책을 구했고, 이후 다시 돈을 모아 프랑스어 사전을 구입했다. 그는 형 윌리엄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 집 뒤 부엌에서 직접 만든 배터리로 책에 설명된 실험들을 재현했다. 배터리 제작에 필요한 구리판을 살 돈이 부족해지자, 찰스는 가지고 있던 구리 동전을 사용하자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고, 이를 통해 배터리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아버지에게서 1823년부터 1834년까지 런던에서 악기 제작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점차 과학 분야에 대한 관심과 재능을 키워나가, 1828년에는 아코디언과 유사한 악기인 콘서티나를 발명했으며(이는 후에 "잉글리시 콘서티나"로 불린다), 1833년에는 음향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1834년에는 킹스 칼리지 런던의 실험 물리학 교수가 되었고, 1836년에는 그의 과학적 업적을 인정받아 왕립 학회 펠로우로 선출되었다.[26] 초기에는 소리의 전달, 고유 진동, 악기 등 음향학 연구에 집중했다.
2. 3. 결혼과 가정생활

휘트스톤은 1847년 2월 12일 메릴본의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엠마 웨스트(Emma West)와 결혼했다. 엠마 웨스트는 토턴(Taunton) 출신 상인이자 사망한 존 후크 웨스트(John Hooke West)의 딸이었으며, 결혼은 면허(by licence)에 의해 이루어졌다. 휘트스톤 부부는 슬하에 다섯 자녀를 두었으나, 엠마는 186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가정생활은 조용하고 평범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4. 과학자로서의 경력
아버지인 악기 제작자에게서 1823년부터 1834년까지 런던에서 기술을 배웠다. 처음에는 소리의 전달이나 고유 진동, 악기 등 음향 연구에 집중했다. 1828년에는 아코디언과 비슷한 악기인 콘서티나를 발명했으며, 이는 후에 '잉글리시 콘서티나'로 불리게 되었다. 1833년에는 음향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1834년 킹스 칼리지 런던의 실험 물리학 교수가 되었고, 1836년에는 왕립 학회 펠로우로 선출되었다.[26] 그는 전기 및 물리학 분야에서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1833년 새뮤얼 헌터 크리스티가 고안한 전기 저항 측정법을 개량하여 휘트스톤 브리지를 개발했으며, 같은 해 스테레오 스코프도 발명했다. 1834년에는 전선을 통해 흐르는 전류의 속도를 최초로 측정하는 데 성공했다. 1840년에는 전기 저항을 연속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장치인 레오스타트를 발명했다.
그 후, 전기 기술자인 윌리엄 쿡과 협력하여 전신 개발에 힘썼다. 1836년 5개의 바늘을 사용하는 5침식 전신기를 발명했고, 이듬해인 1837년 런던의 유스턴역과 캠던타운 사이에서 성공적으로 시험 운영을 마쳤다. 이 전신기는 이후 철도 시스템에 도입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그는 자동 전신 시스템도 완성했다.
1854년에는 친구인 플레이페어 경과 함께 사용하기 위해 "플레이페어 암호"를 고안했으며, 이 암호는 친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휘트스톤은 과학적 업적을 널리 인정받아 다양한 영예를 안았다. 자동 전신을 완성한 공로로 1868년 기사 작위를 받았다.[2] 이전에는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슈발리에 등급을 받았다. 국내외 학회로부터 약 34개의 훈장과 학위를 받았으며, 이는 그의 높은 과학적 명성을 보여준다. 그는 1859년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873년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인 준회원이 되었다. 같은 해 프랑스 국가 산업 장려 학회로부터 앙페르 메달을 수상했으며, 1875년에는 토목 기사 협회의 명예 회원이 되었다. 또한 옥스퍼드에서 명예 법학박사(D.C.L.) 학위를, 케임브리지에서 명예 법학박사(LL.D.) 학위를 받았다.
3. 음악 기기 및 음향학 연구
찰스 휘트스톤은 초기에 소리의 전달, 고유 진동, 악기 등 음향학 연구에 집중했다.[26] 그는 1821년 '마법의 리라'(Acoucryptophone|어쿠크립토폰eng)라는 장치를 선보여 대중의 관심을 끌었는데, 이는 소리가 고체 매질을 통해 전달되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이 시기 휘트스톤은 소리의 전파 속도에 대한 실험을 진행하며, 고체 막대를 이용해 소리 신호나 음악, 음성을 장거리로 전송하는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이를 '전화(telephone)'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또한 약한 소리를 증폭시키는 기계 장치인 '마이크로폰(microphone)'을 고안했다. 이는 오늘날의 전기 마이크로폰과는 다른 원리의 장치였다.
1823년 악기 제작자였던 삼촌이 사망하자, 휘트스톤은 형 윌리엄과 함께 사업을 인수하여 운영했다. 그는 사업 자체보다는 기존 악기를 개량하거나 새로운 악기를 발명하는 데 더 큰 흥미를 보였다. 그의 가장 유명한 발명품으로는 육각형 모양의 자유 리드 악기인 잉글리시 콘서티나가 있다. 또한 1827년에는 소리의 진동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만화경(kaleidophone)'을, 1828년에는 독일의 관악기를 개량한 '심포니엄(Symphonium)'을 발명하여 1829년 특허를 받았다.[5] 휴대용 하모늄 역시 그의 발명품으로, 1851년 만국 박람회에서 상을 받았다. 그는 볼프강 폰 켐펠렌의 말하는 기계를 개선하는 연구를 하기도 했으며, 데이비드 브루스터 경처럼 노래하고 말하는 기계의 등장을 예견했다.
1834년에는 킹스 칼리지 런던의 실험 물리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대중 앞에서 강연하는 것을 어려워하여 주로 실험 시연에 집중했다고 알려져 있다.
3. 1. 초기 음향 실험과 '마법의 리라'
1821년 9월, 휘트스톤은 런던 폴 몰의 악기 상점과 애들레이드 갤러리에서 '마법의 리라' 또는 '음향 암호화기'를 전시하여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이것은 천장에 끈으로 매달린 모조 리라였는데, 실제로는 피아노, 하프, 덜시머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주되는 여러 악기의 소리를 전달받는 울림통이었다. 소리의 진동은 숨겨진 악기들로부터 강철 막대를 통해 리라로 전달되었다. 이 시기에 휘트스톤은 소리와 그 전달 방식에 대한 수많은 실험을 진행했으며, 그의 결과 중 일부는 톰슨의 1823년 ''Annals of Philosophy''에 기록되어 있다.휘트스톤은 소리가 대기의 파동이나 진동에 의해 전파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빛이 에테르의 파동에 의해 전파된다고 믿었는데, 그는 소리도 비슷한 방식으로 이해했다. 그는 물, 유리, 금속 또는 소리가 잘 전달되는 나무와 같은 고체가 높은 속도로 진동을 전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 바탕으로 고체 막대를 이용하여 소리 신호, 음악 또는 음성을 장거리로 전송하는 계획을 구상했다. 그는 소리가 고체 막대를 통해 초당 200마일의 속도로 이동할 것이라고 추정하고, 이 방식으로 런던에서 에든버러까지 전신을 보낼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 장치를 '전화(telephone)'라고 불렀다. (로버트 훅은 이미 1667년 그의 저서 ''미크로그라피아''에서 팽팽한 철사를 이용하면 소리를 매우 먼 거리까지 거의 즉시 전파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는 기계식 전화 또는 '연인의 전화'의 기본 원리가 된다.)
1821년 9월 1일 ''Repository of Arts''의 한 기고가는 '마법의 리라'를 보고, 오페라 공연을 킹스 극장에서 하면서 하노버 스퀘어 룸스나 심지어 케닝턴의 혼스 선술집에서도 동시에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그는 진동이 지하 도관을 통해 마치 파이프 속 가스처럼 이동할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는 더 나아가 "음악이 이렇게 전달될 수 있다면, 아마 말의 단어들도 같은 방식으로 전파될 수 있을 것이다. 변호사의 웅변이나 의회의 토론을 다음 날 신문으로 읽는 대신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휘트스톤은 소리를 멀리 전달하는 것 외에도 약한 소리를 증폭하는 간단한 기기를 고안했는데, 그는 이것을 '마이크로폰(microphone)'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두 개의 가느다란 막대로 구성되어 기계적 진동을 양쪽 귀에 직접 전달하는 방식으로, 오늘날의 전기 마이크로폰과는 전혀 다른 원리이다.
3. 2. 음향 전송에 대한 아이디어와 '전화'
1821년 9월, 휘트스톤은 런던 Pall Mall의 악기 상점과 애들레이드 갤러리에서 '마법의 리라'(Acoucryptophone|어쿠크립토폰eng) 또는 '음향 암호화기'를 전시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이 장치는 천장에 끈으로 매달린 모조 리라였는데, 피아노, 하프, 덜시머 등 여러 악기의 소리를 냈다. 사실 이것은 단순한 울림통이었고, 천장에 연결된 끈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주되는 악기들의 진동을 전달하는 강철 막대였다. 이 시기 휘트스톤은 소리와 그 전달 방식에 대해 많은 실험을 진행했으며, 그의 결과 중 일부는 톰슨의 1823년 ''철학 연보''에 보존되어 있다.그는 소리가 공기의 파동이나 진동에 의해 전파된다는 것을 인식했는데, 이는 당시 빛이 광원 에테르의 파동에 의해 전파된다고 믿었던 것과 유사한 생각이었다. 그는 물, 유리, 금속 또는 소리가 잘 나는 나무와 같은 고체는 높은 속도로 진동을 전달한다는 사실에 주목했고, 이를 이용해 소리 신호, 음악 또는 음성을 장거리로 전송하는 계획을 구상했다. 그는 소리가 고체 막대를 통해 초당 200마일(약 320km)로 이동할 것이라고 추정하고 이 방식으로 런던에서 에든버러까지 전신을 보낼 것을 제안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장치를 '전화(telephone)'라고 불렀다. (로버트 훅은 1667년에 출판된 그의 ''미크로그라피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팽팽한 철사를 사용하여 빛의 움직임과 거의 같은 속도로 소리를 매우 먼 거리까지 순식간에 전파했다는 것을 독자에게 확신할 수 있습니다.' 철사가 반드시 직선일 필요는 없었고, 각도로 구부릴 수도 있었다. 이 속성은 수세기 전에 중국인들에게 알려진 것으로 알려진 기계식 또는 연인의 전화의 기초이다. 훅은 또한 청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가능성을 고려했다.)
1821년 9월 1일 ''예술 보고서''의 한 작가는 '마법의 리라'를 언급하면서, 킹스 극장에서 공연되는 오페라를 하노버 스퀘어 룸스나 심지어 혼스 선술집, 케닝턴에서도 즐길 수 있는 미래를 내다보았다. 진동이 파이프 속의 가스처럼 지하 도관을 통해 이동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 ''그리고 만약 음악이 이렇게 전달될 수 있다면,'' 그는 관찰한다, ''아마 말의 단어들도 같은 전파 수단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변호사의 웅변, 의회의 토론은 다음날에야 읽히는 대신 - 그러나 우리는 이 흥미로운 주제를 추구하다가 길을 잃을 것이다.''
휘트스톤은 소리를 멀리 전달하는 것 외에도 약한 소리를 증폭하는 간단한 기기를 고안했는데, 그는 그것을 '마이크로폰(microphone)'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두 개의 가느다란 막대로 구성되어 기계적 진동을 양쪽 귀에 전달하며, 전기 마이크로폰과는 전혀 다르다.
3. 3. 콘서티나와 심포니엄 발명
1823년, 악기 제작자였던 삼촌이 사망하자 찰스 휘트스톤은 형 윌리엄과 함께 사업을 인수했다. 그는 사업 자체보다는 기존 악기를 개선하거나 새로운 악기를 발명하는 데 더 큰 흥미를 보였다.[26]휘트스톤은 소리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여러 장치를 고안했다. 1821년에는 '마법의 리라'를 선보였는데, 이는 피아노, 하프, 덜시머 등 여러 악기 소리를 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멀리 떨어진 악기의 진동을 강철 막대로 전달하는 울림통이었다. 또한 약한 소리를 증폭하는 '마이크로폰'이라는 기계식 장치도 만들었으나, 이는 현대의 전기 마이크로폰과는 다른 원리였다.
그의 가장 유명한 발명품 중 하나는 '''잉글리시 콘서티나'''이다. 1828년에 발명된 이 악기는 64개의 키를 가진 육각형 모양으로, 반음계 연주가 용이하도록 키가 배열되어 있었다. 오늘날에는 주로 민속 악기로 여겨지지만, 19세기에는 심포니엄과 콘서티나가 고급 콘서트에서 진지한 음악을 연주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3] 잉글리시 콘서티나는 휘트스톤 생전에도 점차 인기를 얻었지만,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대중적인 인기의 절정을 맞았다.

1828년, 휘트스톤은 '문트하모니카'라고 불리는 독일의 관악기를 개량하여 '''심포니엄'''(Symphoniumeng)을 만들었고, 이는 1829년 12월 19일에 특허를 받았다.[5] 심포니엄은 입으로 불어 연주하는 자유 리드 악기로, 버튼 키가 논리적으로 배열되어 있어 이후 벨로즈(풀무)를 사용하는 잉글리시 콘서티나의 등장을 예고했다.
이 외에도 휘트스톤은 휴대용 하모늄을 발명하여 1851년 만국 박람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소리와 악기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여러 독창적인 악기를 세상에 선보였다.
3. 4. 기타 음향 관련 연구
1821년 9월, 휘트스톤은 런던 Pall Mall의 악기 상점과 애들레이드 갤러리에서 '마법의 리라' 또는 '음향 암호화기'를 전시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이것은 천장에 끈으로 매달린 모조 리라였는데, 실제로는 피아노, 하프, 덜시머 등 여러 악기의 소리를 내는 울림통 역할을 했으며, 끈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주되는 악기들의 진동을 전달하는 강철 막대였다. 이 시기 휘트스톤은 소리와 그 전달에 관한 많은 실험을 수행했으며, 그 결과 일부는 톰슨의 1823년 ''철학 연보''에 기록되어 있다.그는 소리가 공기의 파동이나 진동으로 전파된다고 이해했으며, 이는 당시 빛이 에테르의 파동으로 전파된다고 여겨졌던 것과 유사하다. 물, 유리, 금속, 소리가 잘 전달되는 나무와 같은 고체는 소리의 변조를 빠른 속도로 전달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를 이용해 소리 신호, 음악, 음성을 장거리로 전송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소리가 고체 막대를 통해 초속 200마일로 이동할 것이라 추정하고, 이 방식으로 런던에서 에든버러까지 전신을 보내는 것을 제안했으며, 자신의 장치를 '전화(telephone)'라고 부르기도 했다. (로버트 훅은 1667년 그의 저서 ''미크로그라피아''에서 팽팽한 철사를 이용하면 소리를 매우 먼 거리까지 거의 빛의 속도로 즉시 전파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는 기계식 전화 또는 연인의 전화의 기초가 되었으며, 수세기 전 중국인들에게도 알려진 원리였다.)
1821년 9월 1일 ''예술 보고서''의 한 기고가는 '마법의 리라'를 언급하며, 킹스 극장에서 공연되는 오페라를 하노버 스퀘어 룸스나 케닝턴의 혼스 선술집에서도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이는 진동이 지하 도관을 통해 가스처럼 이동할 것이라는 생각에 기반한 것이었다. 기고가는 "음악이 이렇게 전달될 수 있다면, 말의 단어들도 같은 방식으로 전파될 수 있을 것이다. 변호사의 웅변이나 의회 토론을 다음 날 읽는 대신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휘트스톤은 소리를 멀리 전달하는 것 외에도 약한 소리를 증폭시키는 간단한 기기인 '마이크로폰(microphone)'을 고안했다. 이는 두 개의 가느다란 막대를 이용해 기계적 진동을 양쪽 귀에 전달하는 방식으로, 오늘날의 전기 마이크로폰과는 다른 원리이다.
1823년 악기 제작자였던 삼촌이 사망하자, 휘트스톤은 형 윌리엄과 함께 사업을 이어받았다. 그는 사업 자체보다는 기존 악기를 개량하거나 철학적인 장난감을 만드는 데 더 몰두했다. 그는 자신만의 악기도 발명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잉글리시 콘서티나이다. 이는 64개의 키를 가진 육각형 악기로, 반음계 운지가 논리적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잉글리시 콘서티나는 그의 생애 동안 점차 인기를 얻었으나,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대중적인 인기가 절정에 달했다.[3]
1827년에는 소리를 내는 물체의 진동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인 '만화경(kaleidophone)'을 선보였다. 이는 끝에 은색 구슬이 달린 금속 막대로, 막대가 진동하면 반사된 빛의 점이 공중에서 복잡한 도형을 그리는 것을 볼 수 있게 했다. 그의 광도계 역시 이 장치에서 영감을 얻었을 가능성이 있다.

1828년, 휘트스톤은 '문트하모니카'라는 독일 관악기를 개량하여 '심포니엄(Symphonium)'을 만들었다. 이는 1829년 12월 19일에 특허를 받았으며, 입으로 부는 자유 리드 악기로 버튼 키가 논리적으로 배열되어 있어 이후 벨로즈(풀무)를 사용하는 잉글리시 콘서티나의 등장을 예고했다.[5] 휴대용 하모니움 역시 그의 발명품 중 하나로, 1851년 만국 박람회에서 상을 받았다. 그는 또한 볼프강 폰 켐펠렌의 발성 기계를 개선했으며, 데이비드 브루스터 경처럼 노래하고 말하는 기계가 곧 과학의 성과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초기 연구에서 휘트스톤은 소리의 전달이나 고유 진동, 악기 등 음향 연구에 집중했다.[26]
4. 전기 속도 측정
1834년, 휘트스톤은 전선 속 전기의 속도를 측정하는 획기적인 실험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 그는 전선의 중간을 잘라 스파크가 건너뛸 수 있는 간극을 만들고, 양 끝을 전기로 충전된 라이덴 병의 극에 연결했다. 이로 인해 전선의 양 끝과 중간 지점에서 총 세 개의 스파크가 발생했다. 휘트스톤은 시계 장치에 작은 거울을 달아 고속으로 회전시키면서 세 스파크의 반사 이미지를 관찰했다. 만약 스파크가 동시에 발생한다면 거울에 비친 상은 일직선으로 나타나야 했지만, 실제로는 중간 지점의 스파크가 양 끝의 스파크보다 약간 늦게 나타나는 것이 관찰되었다. 이는 전기가 전선 끝에서 중간까지 이동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이 지연 시간과 거울의 회전 속도를 이용해 전기가 이동하는 데 걸린 시간을 측정했다. 측정된 시간과 전선 길이의 절반을 비교하여 전기 속도를 계산한 결과, 초당 288,000마일이라는 값을 얻었다. 이 값은 현재 알려진 빛의 속도(초당 약 약 299337.24km 또는 300000km)보다 빠르지만, 당시로서는 주목할 만한 측정 결과였다.[6][7]
이미 일부 과학자들은 전기의 속도가 도체의 종류와 주변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프랜시스 로널즈는 1816년에 땅에 묻힌 전기식 전신 케이블에서 신호 지연 현상을 관찰하고 그 원인이 유도 현상임을 밝힌 바 있다.[8] 젊은 시절 이러한 실험을 접했을 가능성이 있는 휘트스톤에게 이는 전신 연구의 동기가 되었을 수 있다. 수십 년 후 전신이 상용화되자, 마이클 패러데이는 절연체로 감싸고 물속에 설치된 해저 케이블 내 전기장의 전파 속도는 초당 약 231744.96km 또는 그보다 느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휘트스톤이 고안한 회전 거울 장치는 이후 레옹 푸코와 이폴리트 피조가 공기와 물에서의 빛의 상대 속도를 측정하는 데 활용했으며, 나아가 빛의 속도 자체를 측정하는 실험에도 사용되었다.
5. 분광학 연구
휘트스톤은 다른 여러 과학자들과 함께 스펙트럼 방출선의 발견과 활용을 통해 초기 분광법 발전에 기여했다.[9][10][11]
1891년 존 먼로는 휘트스톤의 업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835년 영국 과학 진흥 협회 더블린 회의에서 휘트스톤은 금속을 전기 스파크로 기화시켰을 때, 프리즘을 통해 관찰된 빛이 그 금속 특유의 특정 선 스펙트럼을 나타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스파크 빛을 분석하여 어떤 금속으로 스파크를 만들었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12] 이 발견은 스펙트럼 분석의 중요한 기초를 마련했으며, 이후 로베르트 분젠, 구스타프 키르히호프와 같은 과학자들이 이를 활용하여 루비듐과 탈륨 등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고 천체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12]
6. 전신 연구
찰스 휘트스톤은 초기에 소리의 전달이나 고유 진동, 악기 등 음향 연구에 집중했으나[26], 점차 전기 전신 분야로 연구 방향을 전환했다. 1835년, 그는 바론 실링의 전신 시스템에 대한 강연을 통해 전기 전신 기술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이를 중요한 기술로 인식하게 되었다.
휘트스톤의 전신 연구는 그의 폭넓은 전기 및 물리 연구와 맥을 같이 한다. 그는 1833년 새뮤얼 헌터 크리스티가 발명한 전기 저항 측정법을 개량하여 휘트스톤 브리지를 개발했고, 1834년에는 전선 속 전류의 속도를 측정했으며, 1840년에는 전기 저항을 연속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레오스타트를 발명하는 등 전기학 분야에서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기초 연구는 그의 전신 기술 개발에 밑거름이 되었다.
1836년에는 5개의 바늘을 이용한 5침식 전신기를 발명했으며, 이는 이후 윌리엄 쿡과의 협력을 통해 상용화되는 중요한 발명 중 하나가 되었다. 쿡과의 만남(1837년)은 휘트스톤의 전신 연구가 본격적인 상업화 단계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다양한 전신 기술 개발로 이어졌다.
6. 1. 윌리엄 쿡과의 협력
휘트스톤은 막대의 기계적 진동을 이용한 정보 전송 방식을 포기하고 전기 전신 연구로 방향을 전환했다. 1835년, 그는 바론 실링의 전신 시스템에 대한 강연을 통해 전기 전신이 이미 세상을 크게 이롭게 할 수 있는 수단임을 알게 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는 자신만의 전신 계획을 세우고 실험을 진행했으며, 템스 강을 가로지르는 시험선 설치와 런던-버밍엄 철도 노선 설치를 제안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실현되기 전인 1837년 2월 27일, 컨두이트 스트리트에 있는 그의 자택으로 윌리엄 쿡이 찾아오면서 그의 연구 방향에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쿡은 원래 마드라스 육군 장교였으나, 휴가 중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해부학 강의를 듣던 1836년 3월 6일, 게오르크 뭉케 교수의 전신 시연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의학 연구를 중단하고 전신 기술 도입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런던으로 돌아온 쿡은 1837년 1월, 세 개의 바늘을 사용하는 전신을 선보였다. 하지만 과학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껴 마이클 패러데이와 당시 왕립 학회 비서였던 피터 로제에게 조언을 구했고, 로제는 그를 휘트스톤에게 소개했다.
두 번째 만남에서 쿡은 휘트스톤에게 자신이 구상한 전신 시스템을 설명하며 작동 가능한 전신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휘트스톤은 쿡의 방식이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하며 자신의 실험적 전신을 보여주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쿡은 동업을 제안했지만, 이미 명성 있는 과학자였던 휘트스톤은 자신의 연구 결과를 상업화하기보다 발표하는 것을 선호했기에 처음에는 망설였다. 반면 쿡은 전신 사업을 통해 수익을 얻는 것이 주된 목표임을 분명히 했다. 1837년 5월, 두 사람은 각자의 강점을 살려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휘트스톤은 과학적 전문성을, 쿡은 사업적 수완과 행정 능력을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이들의 파트너십 계약은 1837년 11월 19일에 공식적으로 체결되었다.
이들은 공동으로 특허를 출원했는데, 여기에는 휘트스톤이 개발한 5개의 바늘 전신[13]과 전류가 바늘을 수은에 담가 국부 회로를 완성시키고 시계 장치의 멈춤쇠를 풀어 경보를 울리는 계전기 방식의 경보 장치가 포함되었다.
휘트스톤이 주도적으로 개발한 것으로 보이는 5개 바늘 전신은 실링의 전신과 유사하며, 앙페르가 제시한 원리에 기반했다. 송신 측에서 접점 키를 이용해 배터리 회로를 완성하면 전류가 생성되고, 이 전류는 수신 측의 자석 바늘을 감싼 코일을 통과한다. 배터리의 양극 또는 음극 중 어느 쪽을 연결하느냐에 따라 전류 방향이 바뀌고, 이에 따라 바늘이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5개의 독립된 회로가 각각 5개의 바늘을 제어했으며, 바늘들은 다이아몬드 형태의 문자판 중앙을 가로질러 회전했다. 문자판에는 알파벳 문자들이 배열되어 있어, 특정 문자를 가리키도록 두 개의 바늘을 동시에 움직여 신호를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6. 2. 초기 전신 설치와 대중의 관심
휘트스톤은 막대의 기계적 진동을 통해 정보를 전송하는 아이디어를 포기하고 전기 전신 기술 개발에 집중했다. 1835년, 그는 바론 실링의 전신 시스템에 대한 강연을 통해 전기 전신이 세상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는 기술임을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구상을 바탕으로 실험을 진행하며, 템스 강을 가로지르는 시험선을 설치하고 런던-버밍엄 철도에도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실행되기 전인 1837년 2월 27일, 그의 컨두이트 스트리트 자택에 윌리엄 쿡이 방문하면서 그의 연구 방향에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1837년 7월 25일, 6개의 귀환선을 갖춘 실험적인 전신선이 유스턴 종착역과 런던 노스 웨스턴 철도의 캠던 타운 역 사이에 설치되었다. 실제 거리는 2.4km에 불과했지만, 회로 길이를 늘리기 위해 여분의 전선을 추가했다. 시험은 저녁 늦게 진행되었다. 쿡은 로버트 스티븐슨 등 여러 인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캠던 타운에서 기기를 조작했고, 휘트스톤은 유스턴의 매표소 근처 어두컴컴한 작은 방에서 촛불 하나에 의지해 기기를 다루었다. 휘트스톤이 첫 메시지를 보내자 쿡이 답신했고, 휘트스톤은 당시의 감정을 "고요한 방에서 홀로 바늘이 딸깍거리며 단어를 만들어내는 소리를 들으며, 이 발명이 논쟁의 여지 없이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느꼈을 때,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강렬한 감정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이 성공적인 시험에도 불구하고, 철도 이사들은 이 새로운 발명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철거를 요청했다. 하지만 1839년 7월, Great Western Railway의 지원을 받아 패딩턴 역에서 웨스트 드레이턴 철도역까지 약 20.92km 거리에 전신선이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일부 구간을 지하에 매설했으나, 나중에는 모두 선로를 따라 세워진 기둥 위로 옮겨졌다. 이 회로는 1841년에 슬라우까지 연장되었고, 패딩턴 역에서는 분당 7,500 km/s의 속도로 50개의 신호를 전송하는 과학의 경이로움으로 대중에게 공개 전시되었다. 입장료는 1실링(£0.05)이었으며, 1844년 한 관람객은 깊은 인상을 받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것은 Great Western의 종착역에서 슬라우까지, 즉 약 28.97km 거리를 완벽하게 작동한다. 전선은 일부 구간에서는 튜브에 넣어 지하에 설치되었고, 다른 구간에서는 공중에 높이 매달려 있는데, 그는 후자가 훨씬 더 나은 방식이라고 말했다. 날씨가 전선에 영향을 미치는지 물었지만, 그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심한 뇌우가 벨을 울릴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없다고 했다. 우리는 작은 방으로 안내받았는데 (그 방에는 드러먼드 부인, 필립스 양, 해리 코딩턴과 나 자신, 그리고 나중에 밀만 부부와 리치 씨가 있었다) 여러 종류의 전신기가 담긴 나무 상자들이 있었다. 한 종류의 기기에서는 모든 단어가 철자되었는데, 각 글자가 특정 위치에 놓이면 기계 장치가 전기를 회로로 흘려보내 슬라우에서 해당 글자가 나타나게 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그 기계 장치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했다. 각 단어 뒤에는 슬라우에서 "알겠습니다"라는 신호가 단어가 끝난 후 1초 이내에 돌아왔다...... 다른 기계는 메시지를 인쇄하는 방식이었는데, 벨이 울리는 것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메시지가 손실되지 않았다. 이는 전기 흐름이 작은 망치로 나타나는 글자를 때리게 하여, 글자가 어떤 다중 필기 용지(새로운 발명품으로, 누르면 지워지지 않는 검은색 자국이 남는 검은색 종이)를 쳐서 흰색 종이에 인상을 남기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이것이 가장 독창적이었고, 분명히 휘트스톤 씨가 가장 아끼는 것이었다. 그는 매우 친절하게 설명했지만, 그것을 너무 잘 이해하고 있어서 우리가 얼마나 모르는지를 인지하지 못하고, 무지한 우리들이 모든 것을 따라잡기에는 너무 빠르게 설명했다. 드러먼드 부인은 그의 사고 속도와 발명력에 놀라움을 표했다. 그는 너무 많은 것을 발명해서 자신의 아이디어 절반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가져가 사용하고 공로를 인정받도록 내버려 둔다고 말했다.[14]
1845년, 살인자 존 토웰이 전신 기술을 이용한 추적으로 체포되면서 대중들은 이 새로운 발명품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휘트스톤은 '단일 바늘'과 '이중 바늘'이라는 두 가지 개선된 형태의 전신 장치를 선보였다. 이 장치들은 바늘의 연속적인 움직임으로 신호를 만들었다. 특히 전선 하나만 필요한 단일 바늘 장치는 이후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전신 기술의 발달 속도는 다음 두 가지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1855년, 러시아 니콜라이 1세 황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은 불과 몇 시간 만인 당일 오후 1시경 상원에 전달되었다. 또한 1890년 엡섬 오크스 경마 대회의 결과는 말이 결승선을 통과한 지 단 15초 만에 뉴욕에 수신되었다.
6. 3. 쿡과의 갈등과 중재
1841년, 전기 전신 발명에 대한 공로 분배를 놓고 쿡과 휘트스톤 사이에 이견이 발생했다. 이 문제는 쿡 측 대표인 엔지니어 마크 이삼바드 브루넬과 휘트스톤 측 대표인 킹스 칼리지의 존 프레데릭 다니엘 교수(다니엘 전지 발명자)에게 중재를 요청하여 해결하고자 했다.중재자들은 전신을 국가적으로 유용한 사업으로 도입한 공로는 쿡에게, 휘트스톤은 그의 연구를 통해 대중이 전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시킨 공로를 인정했다. 그들은 "이 중요한 발명이 그들이 협력한 5년 동안 빠르게 발전한 것은 상호 협력에 적합한 두 신사의 공동 노력 덕분이다"라고 결론 내리며, 바늘 전신이 공동의 산물임을 밝혔다. 이는 휘트스톤이 주로 발명에 기여했다면, 쿡은 주로 도입과 사업화에 기여했음을 의미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저자와 출판업자에 비유될 수 있지만, 쿡 역시 실제 발명 작업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6. 4. 추가적인 전신 연구와 자동 전신
휘트스톤은 막대의 기계적 진동을 이용한 정보 전송 방식 대신 전기 전신 기술을 채택했다. 1835년, 그는 바론 실링이 고안한 전신 시스템에 대해 강연하며 전기 전신이 세상을 크게 발전시킬 수단임을 강조했다. 그는 자신만의 전신 시스템 실험을 진행했고, 템스 강을 가로지르는 시험선을 설치하거나 런던-버밍엄 철도 노선에 적용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구체화되기 전인 1837년 2월 27일, 컨두이트 스트리트에 있는 그의 자택으로 윌리엄 쿡이 찾아오면서 그의 연구 방향에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1836년부터 1837년 사이 휘트스톤은 해저 전신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1840년에는 도버와 칼레를 잇는 해저 전신선 설치 계획과 관련하여 하원 철도 위원회에서 증언했으며, 해저 케이블을 제작하고 설치하는 기계 장치도 직접 설계했다. 1844년 가을에는 J. D. 르웰린의 도움을 받아 절연 처리된 전선을 스완지 만 바다에 담그고, 배 위에서 멈블스 등대까지 신호를 보내는 실험에 성공했다. 이듬해에는 영국 해협을 횡단하는 전신선 피복재로 구타페르카 사용을 제안했다.
1840년, 휘트스톤은 단계별로 움직이며 다이얼에 문자를 표시하는 알파벳 전신, 이른바 '휘트스톤 A B C 기기'에 대한 특허를 획득했다. 이 원리는 1841년에 특허를 받은 활자 인쇄 전신에도 적용되었다. 이 장치는 전보 내용을 활자로 인쇄하는 최초의 기계였다. 두 개의 회로로 작동했으며, 활자가 회전하면 전류에 의해 작동되는 해머가 필요한 문자를 종이에 찍는 방식이었다.
전신 기술 도입이 활발해지면서 1845년 9월 2일 전기 전신 회사가 등록되었고, 휘트스톤은 쿡과의 파트너십 계약을 통해 공동 발명품 사용 대가로 3.3만파운드를 받았다.
1859년, 휘트스톤은 무역부의 요청으로 대서양 케이블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1864년에는 대서양 전신 회사의 자문 전문가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1865년과 1866년 대서양 횡단 전신선 건설 성공에 기여했다.
1870년, 영국 내 여러 회사가 운영하던 전기 전신선은 우체국으로 이관되어 국가 관리하에 놓이게 되었다.
휘트스톤은 또한 자동 송신기, 즉 휘트스톤 시스템을 발명했다. 이 장치는 먼저 종이 테이프(펀치 테이프)에 메시지 신호를 구멍으로 뚫은 다음, 이 테이프를 전송 장치에 통과시켜 신호 전류를 제어하는 방식이었다. 사람이 직접 전신 키를 조작하는 대신 기계를 사용함으로써, 그는 분당 약 100단어, 즉 기존 방식보다 5배 빠른 속도로 전보를 보낼 수 있었다. 우편 전신 서비스는 이 장치를 주로 언론 기사 전송에 활용했으며, 이후 기술 개선을 통해 런던에서 브리스톨까지는 분당 600단어, 런던과 애버딘 사이에서는 분당 400단어의 속도로 메시지를 전송할 수 있게 되었다. 1886년 4월 8일 밤, 글래드스턴 총리가 아일랜드 자치 법안을 발표했을 때, 세인트 마틴 르 그랑의 중앙 전신국에서는 100대의 휘트스톤 송신기를 통해 150만 단어가 넘는 방대한 양의 전보가 전국으로 발송되었다. 구멍 뚫린 종이 테이프를 이용한 메시지 전송 아이디어는 1846년 알렉산더 베인이 먼저 특허를 냈지만, 휘트스톤은 숙련된 기계공이자 유능한 실험가였던 어거스터스 스트로의 도움을 받아 이 아이디어를 성공적으로 구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 시스템은 종종 '휘트스톤 천공기'라고 불리며, 주식 시장에서 사용되는 증권 시세 표시기의 초기 형태로 여겨지기도 한다.
7. 광학 연구
찰스 휘트스톤은 광학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입체시와 관련된 연구를 통해 입체경과 의사경을 발명하였다. 그의 연구는 인간이 어떻게 입체감을 인지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기여했다.
7. 1. 입체경과 의사경

입체시는 1838년 휘트스톤에 의해 처음 설명되었다.[17] 그는 양안시에 대한 연구로 1840년 왕립 학회로부터 왕립 메달을 받았는데, 이 연구는 그가 입체 그림을 만들고 입체경(Stereoscope)을 제작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휘트스톤은 사람이 입체감을 느끼는 이유가 두 눈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본 두 개의 이미지를 뇌에서 하나로 합치기 때문임을 밝혔다. 이를 바탕으로 입체경은 렌즈나 거울을 이용해 약간 다른 각도에서 찍힌 두 장의 사진을 합쳐 보이게 함으로써 물체가 입체적으로 느껴지도록 만든다. 이후 데이비드 브루스터 경은 거울 대신 렌즈를 사용하여 입체경을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로 개선했다.
휘트스톤은 1852년에 의사경(Pseudoscope)을 선보였다. '의사경'이라는 이름은 그가 그리스어 ψευδίς σκοπειν|프세우디스 스코페인grc(거짓 보기를 의미)에서 따온 것이다. 의사경은 입체경과 반대되는 효과를 내도록 설계되어, 볼록한 물체는 오목하게 보이고 가까이 있는 물체는 더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예를 들어, 사람의 얼굴 조각상(흉상)은 가면처럼 움푹 들어가 보이고, 창문 밖에 있는 나무는 마치 방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휘트스톤은 의사경을 통해 자신의 입체 시각 이론을 검증하고, 오늘날 실험 심리학이라 불리는 분야의 연구를 수행하고자 했다.
8. 시간 측정 연구
1840년, 휘트스톤은 매우 짧은 시간 간격을 측정할 수 있는 크로노스코프(chronoscope)를 선보였다. 이 장치는 전자석을 이용하여 움직이는 종이 위에 사건 발생 순간을 기록했으며, 탄환의 속도나 별의 통과 시간을 측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크로노스코프는 1/7300초(137 마이크로초), 즉 물체가 약 2.54cm 높이에서 떨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까지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정밀했다.
같은 해 11월 26일, 휘트스톤은 왕립 학회 도서관에서 자신의 전기 시계를 전시하고, 표준 시계에서 여러 지역 시계로 정확한 시간을 전달하는 시스템을 제안했다. 이 시스템은 표준 시계의 접촉기를 통해 회로에 전기를 공급하고, 전자기력으로 각 시계의 시침을 조정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41년 1월, 알렉산더 베인이 전자기 시계에 대한 특허를 먼저 취득하면서 논란이 시작되었다. 베인은 1840년 8월부터 12월까지 휘트스톤의 기계공으로 일하면서 자신이 고안한 전자기 시계 아이디어를 휘트스톤에게 설명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휘트스톤은 이미 그해 5월부터 관련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고 반박했다.
베인은 또한 휘트스톤이 자신의 전자기 인쇄 전신기 아이디어를 도용했다고 비난했지만, 휘트스톤은 해당 기기가 자신의 기존 전자기 전신기를 단순히 수정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베인은 1840년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중 'Mechanics Magazine' 편집자의 소개로 휘트스톤을 만났다. 베인이 자신의 모델을 시연하자 휘트스톤은 "아, 이런 것들을 더 개발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을 겁니다! 전망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3개월 후, 휘트스톤은 왕립 학회에 전기 시계를 시연하며 자신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베인은 이미 이에 대한 특허를 신청한 상태였다. 휘트스톤은 베인의 특허를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휘트스톤이 전기 전신 회사 설립을 위한 의회 법안을 추진할 때, 영국 상원은 베인을 증인으로 소환했다. 조사 결과, 상원은 회사 측에 베인에게 1만파운드를 지불하고 그를 매니저로 고용하도록 강제했으며, 이 일로 인해 휘트스톤은 결국 회사에서 사임하게 되었다.
8. 1. 극시계
찰스 휘트스톤의 가장 독창적인 장치 중 하나는 1848년 영국 과학 진흥 협회 회의에서 전시된 '극시계'이다. 이 시계는 데이비드 브루스터 경이 발견한 사실, 즉 하늘의 빛이 태양의 위치에서 90도의 각도로 편광된다는 원리에 기반한다. 따라서 편광면을 찾고 북쪽을 기준으로 그 방위각을 측정하면, 지평선 아래에 있는 태양의 위치를 파악하여 겉보기 태양시를 구할 수 있다.극시계는 접안렌즈로 니콜 프리즘을, 대물렌즈로 얇은 셀레나이트 판을 가진 망원경으로 구성되었다. 망원경 튜브를 천구의 북극 방향, 즉 지구의 자전축과 평행하게 향하게 한 뒤, 접안렌즈의 프리즘을 돌려 색깔이 보이지 않게 조정하면 된다. 이때 눈금판 위에서 프리즘과 함께 움직이는 지표가 가리키는 회전 각도가 시간을 나타낸다.
이 장치는 시계가 정확한 국가에서는 실용성이 떨어졌지만, 1875년부터 1876년까지 조지 나레스 선장이 지휘한 영국 북극 탐험에서 사용된 기록이 있다.
9. 휘트스톤 브리지
휘트스톤 브리지는 원래 1833년 새뮤얼 헌터 크리스티가 발명하여 ''철학회보''에 발표한 전기 저항 측정법이다. 그러나 크리스티의 발표 당시에는 이 방법이 널리 알려지거나 활용되지 못했다.
1843년 찰스 휘트스톤은 왕립 학회에 '전기 회로의 상수를 결정하는 몇 가지 새로운 과정에 대한 설명'이라는 제목의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크리스티가 고안했던 전기 저항 측정 장치를 상세히 설명하고 그 실용적인 가치를 알렸다. 휘트스톤은 이 장치를 '균형 장치(balance)'라고 불렀으나, 그의 소개 이후 휘트스톤 브리지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휘트스톤은 이미 1833년에 이 저항 측정법을 개량한 바 있다.
휘트스톤의 1843년 논문에는 휘트스톤 브리지에 대한 설명뿐만 아니라, 옴의 법칙을 실제 회로에 적용하여 전류와 저항을 계산할 수 있는 간단하고 실용적인 공식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그는 전기 저항의 표준 단위로 '100 그레인(6.5g)의 구리선 약 0.30m'를 제안하고, 저항 측정을 통해 전선의 길이를 알아내는 방법을 제시하는 등 전기 측정 기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휘트스톤은 이 논문으로 왕립 학회로부터 메달을 수여받았다.
10. 암호 연구
찰스 휘트스톤은 암호 분야에서도 뛰어난 독창성을 발휘했다. 그는 1854년 친구인 플레이페어 경과 함께 취미로 사용하기 위해 플레이페어 암호를 고안했으며, 이 암호는 플레이페어 경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당시로서는 특이했던 이 암호는 초기에는 암호 분석에 대한 저항력이 강했으며, 여러 국가의 군대에서 적어도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국 정보기관에서도 활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22]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해독 방법이 개발되었다.
휘트스톤은 또한 대영 박물관에 소장된 암호 원고를 해석하는 작업에도 참여했다. 더 나아가 메시지를 암호화하는 기계, 즉 암호화된 메시지를 해독하려면 해당 기계에 다시 입력해야만 하는 방식의 암호 기계를 고안하기도 했다.
11. 전기 발전기 연구
1840년, 휘트스톤은 연속 전류를 생성하기 위한 자신의 자기 전기 기계를 선보였다.
1867년 2월 4일, 그는 왕립 학회에 제출한 논문을 통해 전기 발전기 내부의 반응 원리를 발표했다. 하지만 C. W. 지멘스는 휘트스톤보다 10일 먼저 같은 발견을 발표했으며, 두 사람의 논문은 같은 날 발표되었다.
이후 베르너 폰 지멘스, 새뮤얼 앨프레드 발리, 그리고 휘트스톤이 서로 몇 달 간의 시간차를 두고 독립적으로 이 원리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발리는 1866년 12월 24일에 특허를 받았고, 지멘스는 1867년 1월 17일에 이 사실을 알렸으며, 휘트스톤은 앞서 언급한 날짜인 1867년 2월 4일에 왕립 학회에서 이를 시연했다.
12. 발명 관련 논쟁
휘트스톤은 평생 동안 다양한 기술 분야에서 자신의 역할과 관련하여 다른 과학자들과 여러 차례 논쟁을 벌였으며, 때로는 과도한 공을 세우려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위에 언급된 윌리엄 포더길 쿡, 알렉산더 베인, 데이비드 브루스터 외에도, 그는 큐 천문대의 프랜시스 로널즈와도 이러한 갈등을 겪었다. 많은 사람들은 휘트스톤이 1840년대에 로널즈가 천문대에서 발명하고 개발한 대기 전력 관측 장치를 만들었고, 최초의 자동 기록 기상 장비를 설치했다고 잘못 믿었다 (예: Howarth, p158 참조).
13. 서훈
휘트스톤은 다양한 영예를 안았다. 1836년에는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고, 1859년에는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자동 전신을 완성한 공로로 1868년에는 기사작위(Knight Bachelor)를 받았다.[2] 이전에는 프랑스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훈장을 받기도 했다. 1873년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인 준회원이 되었으며, 같은 해 국가 산업 장려를 위한 프랑스 학회로부터 앙페르 메달을 수상했다. 1875년에는 토목 기사 협회의 명예 회원이 되었다. 또한 옥스퍼드에서 명예 법학박사(D.C.L.) 학위를, 캠브리지에서 명예 법학박사(LL.D.) 학위를 받았다. 이 외에도 국내외 학회로부터 받은 약 34개의 훈장과 졸업장이 그의 과학적 업적을 보여준다.
14. 주요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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